한국 최초 국제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만들고 지난 21년간 BIFF를 떠나지 않은 유일한 사람. 한국에서 가장 오랜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김지석씨의 생애를 돌아봤다.

故 김지석, 1960년생. 한국 최초 국제영화제인 BIFF를 만든 멤버 중 막내. BIFF의 수석프로그래머이자 부집행위원장으로, 지난 21년간 자의로든 타의로든 BIFF를 떠나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오랜 영화제 프로그래머 경력을 가진 이. “추모 영상을 만들고 있는데 선생님이 사진 중간에 있는 사진이 거의 없어요.” 김정윤 BIFF 홍보실장의 말이다. 김지석은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걸어다니는 BIFF의 역사였고 증인이었다.
지난 5월18일 김지석은 프랑스 칸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향년 57세. 영화제 참석을 위해 칸에 도착했던 5월16일부터 조짐은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휴식을 권했다. 2016년 3주간 입원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고혈압과 고지혈, 그리고 약간의 당뇨 증세를 진단받았다. 그런 병의 목록이 그를 죽음으로 이끈 것만은 아니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김지석에게 1996년은 특별한 해다. 그해 결혼했고, 아들이 생겼고, 수년간 공들인 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를 출범시켰다. 영화제를 만들긴 했는데 당장 사무국을 운영할 돈 한 푼 나올 구멍이 안 보이던 때였다. 수영만 요트경기장 본부 건물 2층 쪽방에 책상 3개를 놓을 수 있었던 건, 그가 결혼자금으로 모아뒀던 500만원을 선뜻 내놓은 덕분이었다. 김지석의 ‘40년 지기’이자 그의 “사악한 꼬임”에 넘어가 훗날 BIFF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 된 오석근은 이렇게 말했다. “그 돈을 한 번도 돌려달라고 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김지석의 마음에 불을 지른 영화제는 따로 있었다. 1992년 여름,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작지만 권위 있는’ 페사로 영화제가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한국 영화를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기획전을 열었다. 한국영화특별전 책자의 필자로 참여한 평론가들이 초청되었고, 김지석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김지석은 세미나를 할 때나 모임이 있을 때면 “우리도 국제영화제를 할 수 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반응은 미지근했다. 오석근의 말이다. “야 이 미친놈아, 그게 가능하냐.” 이용관은 대답 대신 술잔을 건넸다. 김지석은 못 마시는 술잔을 받아 삼키고는 기절했다.
김동호 BIFF 이사장은 “1995년 8월18일 오전 10시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그날 김동호는 서울 프라자호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문화부 차관, 영화진흥공사 사장까지 역임했던 그에게 ‘일천한 경력’의 30대들이 찾아와 국제영화제를 열고 싶은데 집행위원장으로 와달라고 했다. 이용관과 전양준 그리고 김지석이었다. 국내에서 국제영화제를 만들려는 시도가 그동안 없었던 게 아니었다. 김동호에게 도움을 구한 이들도 이미 여럿이었다. 그러나 이들처럼 구체적인 계획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프라자 회동’이 성사됐다.
한국 최초 영화 제작사인 ‘조선키네마 주식회사’가 설립됐던 도시, 한국 최초의 영화평론 모임이 결성됐던 도시, 부산에 다시 한번 영화의 바람이 불었다. ‘비경쟁’과 ‘아시아’를 화두로, 국가가 아닌 민간이 주도하고 기획한 국제영화제. ‘그런 거’는 서울에서나 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를 비웃듯 5만명을 예상했던 제1회 BIFF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18만 관객을 모았다.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데 극장에서 쥐가 나오고, 갑자기 자막이 안 나오고, 통역이 없어 관객이 통역사로 나서고….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실수가 거듭되는 와중에 김지석을 비롯한 스태프들의 몸무게는 10㎏ 가까이 줄었다. 영화제 마지막 날, 영화 동아리를 함께했던 친구의 말 한마디가 김지석의 눈물샘을 터뜨렸다. “소원 성취했네요.”

1992년 여름 이탈리아 페사로 영화제에 참석한 김지석·전양준·박광수(왼쪽부터).
+ 출처 :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9315